독서기록

<브레네 브라운 - 마음가면> 좋았던 부분들

상자밖 2023. 4. 3. 18:51

 

 

 

취약성이란 상처받거나 공격당하기 쉬운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는 나약함과는 다르다. 취약성은 자신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삶에서 실패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며 도전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즉, 대담하게 뛰어드는 것이다.

 

사회복지학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순서대로 거치면서 내가 얻은 확실한 교훈이 하나 있다. 연결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타인과 연결되려는 본능이 있다. 관계는 우리의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한다. 타인과 관가 단절될 때 우리는 고통을 받는다.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을 위한 열 가지 지침>

1.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연연하지 말고, 진짜 나를 소중히 여길 것

2. 완벽주의를 버리고, 자신에게 조금 더 관대해질 것

3. 감정 마비와 무기력에서 벗어나 회복탄력성을 기를 것

4. 부족하다는 생각은 그만두고, 매일 감사하고 기뻐할 것

5.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고, 직관력과 믿음을 키울 것
6. 남과 비교하는 버릇을 버리고, 창의력을 기를 것
7. 진정한 나를 위한 일을 하고, 놀이와 휴식도 즐길 것
8. 고요한 명상의 시간을 마련해 만성적인 불안에서 해방될 것
9. 자신에 대한 의심과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의미 있는 일을 만들 것
10. 모든 걸 통제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웃음과 노래와 춤을 더 자주 즐길 것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이란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세상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용기와 공감 능력을 지니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든, 미처 못 해낸 일이 얼마나 많든 나를 긍정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나는 불완전하고 취약한 존재야. 때로는 뭔가를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용감한 사람이라는 진실은 바뀌지 않아. 나는 사랑과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야.'

 

누군가를 사랑하고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 어딘가에 소속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들의 삶이 더 윤택하거나 수월하지는 않았다. 중독이나 우울증이 더 적은 것도 아니었고, 트라우마나 파산, 이혼을 겪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불행을 남들보다 더 잘 견뎌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들은 그 모든 난관 속에서도 자신이 사랑받고 소속되고 기쁨을 느낄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삶의 지침들을 받아들이고 날마다 실행하기 위해 노력할 때 자라난다.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메시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불확실하다. 사랑은 무척 위험하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감정을 노출한다. ...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도 않는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감정을 견뎌내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어릴 적에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취약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취약성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 매들린 렝글

 

취약성은 상호관계에 기초하므로 신뢰와 경계가 필요하다. 취약성을 끌어안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털어놓는다거나, 무차별적인 노출을 한다거나, 유명인들처럼 SNS에 정보를 함부로 투하하는 것과 다르다. 취약해진다는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감정과 경험을 털어놓는 것이다. 취약성을 끌어안고 솔직해진다는 것은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뗄 수 없는 부분으로 대개는 쌍방향으로 이뤄진다. 뭔가를 털어놓기 전에 항상 보증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면을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 그런 행동은 취약성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의 몸짓일 수도 있고, 상처일 수도 있고, 이상한 방법으로라도 타인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병적 증상일 수는 있어도 취약성은 아니다. 왜일까? 우리가 정상적으로 뭔가를 털어놓을 때는 경계를 유지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줘도 괜찮을 정도의 관계를 쌓아온 사람들에게 털어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를 존중하는 취약성은 관계를 더 깊게 만들고, 신뢰를 쌓고, 진정 어린 참여를 끌어낸다. '모든 걸 털어놓기' 즉 경계없는 폭로는 유리가 진짜 취약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취약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신뢰해야 하고, 누군가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취약해져야 한다. 신뢰를 평가하는 시험은 없고, 점수를 매길 방법도 없다. 이제부터 당신의 본모습을 보여줘도 안전하다고 말해주는 초록색 신호도 없다. 신뢰란 과정이며 오랜 시간에 걸쳐 한 겹씩 쌓아가는 것이다.

 

나는 아내가 나를 원할 때 곁에 있어줬다. 내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지 않고 아내와 감정을 나눴다. 신뢰란 이런 아주 작은 순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순간 하나가 뭔가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번번이 발길을 돌리는 쪽을 선택한다면 신뢰는 허물어질 것이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은밀한 배신'이란 '놓아버리기'를 뜻한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관계를 방치하는 것, 관계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 놓아버리기는 수치심을 낳고 가장 큰 두려움(버림받는 것, 가치 없는 존재가 되는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한다. 은밀한 배신이 거짓말이나 외도보다 위험한 이유는 고통의 근원을 정확히 짚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관계가 깨졌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 이런 일로 괴로워하는 자신이 미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 신뢰와 마찬가지로 배신도 서서히 만들어진다.

 

신뢰는 취약성의 산물로서 오랜 시간 축적되며 노력과 관심, 진정 어린 참여를 요구한다. 신뢰는 거창한 몸짓이 아니다. 신뢰는 항아리에 하나씩 하나씩 채워지는 조약돌과 같다.

 

취약성과 친해지려면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리를 쉽게 비판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연습하도록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 사람들은 대체로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역할을 더 편하게 여긴다. 하지만 취약성과 관련해서는 우리 역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열린 마음을 경험해봐야 한다.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도 은연중에 비판적이 된다.'

 

한때 나는 내가 잘만 하면 취약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취약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상황을 통제하려고 했다. ... 뭔가를 느낄 에너지가 남지 않을 때까지 분주히 움직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내 마음속 상처와 두려움을 정직하게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밖에서 보면 용감한 사람이었지만 나의 내면은 온통 겁에 질린 상태였다.

 

공감은 수치심을 치료하는 약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상대가 공감과 이해를 해주면 수치심은 사그라든다. 자기 자신을 향한 공감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감정이지만, 수치심은 기본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감정이기 때문에 치유도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잘된다. 사회적인 상처에는 사회적인 약이 필요한 법이고, 그 사회적인 약이 바로 공감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공감은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가 수치심 한가운데서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서 도움을 청하고 공감을 경험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수치심 회복탄력성의 4단계>

1.인식 또는 사고

2.비판적 인식

3.도움 청하기

4.수치심에 대해 얘기하기

 

우리가 수치심의 공격을 받을 때 자기 자신에게 어떤 말투를 쓰는지를 한번 점검해보자.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그런 말투를 쓰지 않을 것이다. ... 수치스러웠던 이야기를 혼자만 간직하지 말자. 그 이야기가 곪아 터지거나 나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까지 놓아두지 말자.

 

이야기를 그냥 묻어버리면 우리는 영원히 이야기의 주변 인물로 남는다. 우리가 이야기의 주인이 되려면 결말을 직접 서술해야 한다. 칼 융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과거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미래의 모습이 나를 규정한다."

 

수치심은 우리가 그것을 비밀로 간직할 때 더욱 왕성하게 활동한다. ... 연구에 따르면,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 사건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거나 의논하지 않는 행위는 그 사건 자체보다 더 치명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반대로 트라우마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을 털어놓은 경우에는 육체적 건강이 개선되고 병원 치료 횟수가 줄었으며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유의미하게 낮아졌다. ... '1980년대 중반부터 연구자들은 치유의 수단으로서 글쓰기가 지닌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된 경험을 3~4일 연속으로 하루 15분에서 20분 동안 글로 쓰면 육체적, 정신적 건강 상태에 측정 가능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증거가 쌓이고 있다. 감정을 담아내는 글쓰기는 수면, 업무 효율, 대인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수치심 회복탄력성은 훈련을 통해 길러진다.

 

여자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강력한 원인은 '외모'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 두 번째 원인은 모성애다. 여성과 모성애에 관한 사회의 시각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여자로서 우리의 가치는 엄마로서 혹은 예비 엄마로서 역할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여자들의 수치심이 증폭되는 원인은 완벽해져야 한다는 기대에 있다. 하지만 여자들이 완벽해지려고 기를 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세상은 완벽한 결과물만을 원한다. 우리는 뭐든지 손쉽게 척척 해내야 한다. 자연미인이어야 하고, 엄마 노릇이 체질에 맞아야 하고, 타고난 리더여야 하고, 자연스럽게 좋은 부모가 돼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집안에 속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외모'를 약속하는 상품을 구입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 생각해보라. ... 요즘에도 여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때마다 이런 규범과 마주치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사람에게 가혹한 사람들의 공통점> 여자들 역시 다른 여자들에게 매우 가혹해질 때가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하게 군다. 그럴 때 우리는 섣부른 비판을 하게 된다.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비판함으로써 수치심 거미줄에서 빠져나오거나 수치심 상자를 잠시 잊어버린다. ...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이 수치심을 많이 느끼는 영역에서 유독 다른 사람들을 엄격한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예를 들어 스스로 자녀를 잘 키우고 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다른 부모들의 양육 방식을 비판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은밀하게 확산되는 패턴들을 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수치심의 포로가 됐을 때 우리와 똑같이 포로 신세인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손을 잡고 빠져나와야 한다. .. 우리는 손을 내밀어 서로를 지지해줄 수 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은, 남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도 똑같이 고통스러운 일이며 배우자와 부모야말로 우리의 수치심을 가장 정확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배우자와 부모는 우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며 ... 사랑하는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었을 때 사과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솔직히 수치심을 유발한 말들은 오래도록 상처로 남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취약한 지점을 들춰내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은 관계의 안정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일이다. 사과를 한다 해도 신뢰는 크게 손상된다. 서로만 아는 정보를 무기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장 취약한 모습과 가장 강력한 모습을 상대에게 속속들이 보여주고 알려주면서 사랑을 키운다. 그리고 신뢰와 존중, 친절과 애정을 주고받으며 싹트는 정신적인 연결을 소중히 여긴다. 사랑은 주거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보살피고 키워야 한다. 사랑이 커나가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사랑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수치심, 비난, 무시, 배신, 놓아버리기는 사랑의 뿌리에 상처를 입힌다. 그런 상처를 입고도 사랑이 살아남으려면 상처를 제대로 인식하고 치유해야 한다.

 

가장 느끼기 힘든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우리가 취약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부터 기쁨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함께 접근해야 하는 무엇으로 변한다."나는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최악의 사태를 상상하곤 했어요.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통제할 수 있도록."

 

기쁨을 차단산다는 것은 비극을 연습하고 실망을 거듭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기쁨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가장 음산한 최악의 시나리오로 재빨리 옮겨간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거듭되는 실망에 계속 머물러 있는 편이 낫다고 여겨 아예 기쁨을 발견하지도 못한다.

 

취약성과 기쁨의 관계를 이해하고 나면 답은 명확해진다. 취약해질까봐 선수를 치는 것이다. 우리는 급습을 당해서 상처 입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방비 상태에서 당하는 것이 싫어서 문자 그대로 불행해지는 연습을 하거나 자신이 만든 실망감 안에 머문다.

 

<기쁨에 대한 3가지 교훈>

1. 기쁨은 순간(대개는 평범한 순간)에 찾아오는 감정이다 : 특별한 것을 좇아 너무 바쁘게 살면 기쁨을 놓칠 우려가 있다.

2.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라

3. 기쁨을 아깝게 흘려보내지 마라 : 기쁨에 몸을 내맡기고 그 순간에 녹아들 때 회복탄력성은 커지고 희망이 자라난다.

 

나에게 감사의 표현이란 우아하고 부드럽게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왠지 어색한 일이다. 나는 아직도 기쁨을 느끼는 도중에 취약성에 압도되곤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금은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취약하다. _____덕분에 너무나 감사한다."

 

그간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지만 기쁨과 성공과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을 완벽해지는 것과 결부시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은 내가 취약해지고, 불완전해지고, 나 자신에게 따뜻해질 용기를 키웠을 때 찾아왔습이다."

 

완벽주의는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고 목표의식을 갖게 하는 길이 아니다. 완벽주의는 위험한 우회로다. ... 완벽주의는 최고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 다르다. 완벽주의는 건전한 성취와 성장이 아니다. 완벽주의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우리가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완벽한 외모를 갖춘다면 비난, 비판, 수치심의 고통을 피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완벽주의는 20톤짜리 보호막이다. 그 보호막이 우리를 보호해주리라 믿으면서 그것을 질질 끌고 다니지만, 사실은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한다.

 

또한 완벽주의는 자기계발과 다르다. 완벽주의의 핵심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완벽주의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성과(성적, 품행, 규칙준수, 남들의 비위맞추기, 외모, 스포츠)에 대한 칭찬을 받으며 자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릴 때부터 다음과 같은 위험하고 해로운 믿음을 갖는다. '나의 성과가 나를 규정하는 거야. 그 일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가 나를 규정하는 거야. 사람들을 기쁘게 하자. 과제를 수행하자. 완벽하게 해내자.' 건전한 노력은 '어떻게 해야 내가 발전할까?' 생각하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 반면 완벽주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외부에 초점을 맞춘다. 완벽주의는 성공의 열쇠가 아니다. 오히려 성과를 방해한다. 완벽주의는 우울증, 불안, 중독, 무기력, 기회상실과 높은 상관관계를 갖는다. 우리는 실패와 실수가 두려워서, 사람들의 기대와 어긋나고 비판받는 것이 두려워서 경기장 밖에 머문다.

 

완벽주의는 자기파괴적이고 중독성이 있는 믿음의 체계다. 완벽주의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낸다면 수치심, 비판, 비난의 고통을 피하거나 최소화할 수 았다는 단순한 생각을 강화한다. 완벽주의가 자기파괴적인 이유는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벽은 달성 불가능한 목표다. 완벽주의는 내적 동기가 아니라 지각(인식)과 관련이 깊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지각을 통제할 방법은 없다. 완벽주의에는 중독성이 있다. 수치를 느끼거나, 비판을 받거나, 비난에 휩싸일 때 그 원인을 자기 자신이 완벽하지 않아서라고 믿어버린다. 우리는 완벽주의의 잘못된 논리에 의문을 품는 대신 외모와 행동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완벽주의는 우리에게 수치심, 비판,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수치스러워지고 자신을 탓하게 된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부족해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거야.'

 

완벽주의에 대한 해결책: 나의 부족함도 아름답게 여겨라 대부분의 사람은 완벽주의를 지니고 있다. ... 완벽주의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에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로 생각을 옮겨야 한다. 그것은 긴 여정이다. 그 여정은 수치심 회복탄력성, 자신을 향한 공감, 그리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는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에 관한 진실을 포착하고 삶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에게 여유를 허용하고 자신의 불완전성을 아릅답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더 친절하고 더 따뜻해져야 한다.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 자기공감은 자기를 향한 친절, 보편적인 인간성, 마음챙김으로 구성된다.